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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신발장 비우기 전에, 메모장부터 켰어요
    AI Agent 2026. 7. 15. 21:0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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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펜이 놓인 펼쳐진 노트와 아침 햇살 사진
    신발장 비우기 전에, 메모장부터 켰어요

    토요일 오전에 현관 신발장을 비우기로 했어요.
    칸이 모자라서 안 신는 걸 좀 버리려고요.
    별일 아니죠.
    문 열고, 꺼내고, 안 신는 거 골라서 봉투에 담으면 되는 일이에요.
    그런데 제가 신발 한 짝을 꺼내기도 전에 한 일이, 휴대폰 메모장을 켜는 거였어요.

    손이 신발이 아니라 메모장으로 갔어요

    쪼그려 앉아서 첫 줄을 이렇게 적고 있더라고요.
    "2년 넘게 안 신은 건 무조건 버린다." 그다음 줄.
    "아깝다는 이유로 다시 칸에 넣지 않는다." 세 번째 줄은, "한 켤레라도 '이건 좀 비싼데' 소리가 나오면 그 켤레는 일단 옆에 빼두고 나중에 다시 본다."

    여기까지 적고 나서 좀 멈칫했어요.
    신발장 비우는 데 규칙이 왜 필요하죠.
    근데 손가락은 벌써 네 번째 줄을 치고 있었어요.
    "추억 때문에 못 버리겠으면 사진만 찍고 버린다." 다섯 번째도 적었어요.
    다 적고 보니 다섯 줄짜리 금지·허용 목록이었어요.
    신발은 아직 한 짝도 안 만졌고요.

    이거, 일할 때 하던 거랑 똑같았어요

    그 순간에야 알았어요.
    이게 제가 요즘 일할 때 매일 하는 그 짓이라는 걸요.
    뭘 시작하기 전에, 손을 대기 전에, 메모장부터 켜서 "이건 하지 마라" "이건 이렇게만 해라"를 먼저 박는 버릇.
    회사에서 자료 정리 같은 걸 시킬 때 제일 효과 봤던 게 그거였거든요.
    할 일을 길게 적는 것보다, 멈출 자리랑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을 위에 먼저 깔아두는 거.

    그게 어느새 신발장까지 따라온 거예요.
    신발한테는 멈출 자리를 줄 필요가 없는데.
    신발은 추측으로 빈 칸을 안 채우고, 자릿수를 틀리게 안 적고, 그냥 거기 가만히 있는데.
    받는 쪽이 사람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인데, 나한테 "비싼 거 나오면 멈춰라" 줄을 박고 있었던 거예요.

    그래서 메모를 지웠냐면, 아니에요

    지웠으면 깔끔한 얘기일 텐데, 안 지웠어요.
    오히려 그 다섯 줄 보면서 좀 안심이 됐어요.
    작년에 신발장 비우다가 "아 이건 비싸게 산 건데" 하면서 안 신는 걸 도로 칸에 넣어버린 적이 있거든요.
    그래서 결국 두 켤레밖에 못 버렸어요.
    한 시간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.
    그 줄들이 그때의 나를 막아줄 것 같았어요.

    근데 그러고 나니까 더 이상해졌어요.
    그럼 이 규칙들은 신발을 위한 게 아니라, 한 시간 뒤에 또 흔들릴 나를 묶어두려고 적은 거잖아요.
    AI한테 금지선 박는 거랑, 나한테 금지선 박는 게, 머릿속에서 같은 동작으로 돌아간다는 게 좀.

    그날 신발은 결국 일곱 켤레 버렸어요.
    작년보다 다섯 켤레 더요.
    규칙 덕인지, 그냥 올해는 마음먹은 게 더 단단했던 건지는 모르겠어요.
    다 끝나고 봉투 묶는데 옆에서 가족이 "아까 뭐 그렇게 한참 적던데" 묻더라고요.
    신발 버리는 규칙 적었다고 하긴 좀 그래서, 그냥 살 거 메모했다고 했어요.
    다음에 옷장 정리할 때도 메모장부터 켤 것 같은데, 그게 좋은 버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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