ABOUT ME

-

Today
-
Yesterday
-
Total
-
  • 청구서의 주인공은 제 프롬프트가 아니었습니다
    AI Agent 2026. 7. 25. 09:00
    728x90
    반응형

    어둑한 방의 책상 스탠드와 종이 더미 사진
    청구서의 주인공은 제 프롬프트가 아니었습니다

    청구서를 처음 펼쳤을 때, 제가 제일 오래 들여다본 줄은 제가 쓴 지시문이 아니었습니다.

    작업 자체는 크지 않았습니다.
    화면 곳곳에 같은 식으로 박혀 있던 자잘한 부분을 일괄로 손보는, 손이 많이 가지만 머리는 안 쓰는 종류였습니다.
    한 군데 고치는 법은 정해져 있고, 그걸 아흔 군데에 똑같이 적용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.
    끝나고 나서 비용이 생각보다 두툼하게 찍혔길래, 어디서 이렇게 썼나 줄별로 펼쳐봤습니다.

    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.

    지시문을 깎아도 꿈쩍 안 했습니다

    제가 손댈 수 있다고 믿은 건 메인 지시문이었습니다.
    길게 써둔 규칙, 거기 붙여둔 예시 몇 개.
    그걸 다듬으면 비용이 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.
    글자 수를 줄이면 요금이 준다, 그 정도의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.

    그래서 줄여봤습니다.
    군더더기 빼고, 겹치는 규칙 합치고, 예시도 한두 개 쳐냈습니다.
    다시 돌렸더니 줄긴 줄었습니다.
    사용량 표에서 메인 프롬프트 줄은 눈에 띄게 얇아졌는데, 전체 막대는 십분의 일 남짓만 내려갔습니다.

    나머지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.

    진짜 비용은 제 문장에서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.
    저는 일을 한 덩어리로 시켰다고 생각했는데, 실제로는 그게 여러 갈래로 쪼개져서, 각 갈래마다 따로 일꾼이 붙어 돌고 있었습니다.
    아흔 군데를 동시에 해치우겠다고 일을 잘게 나눠 흩뿌린 거죠.
    그게 빠를 줄 알았습니다.

    문제는, 갈래 하나하나가 같은 짐을 통째로 다시 짊어지고 출발한다는 거였습니다.

    짐을 매번 새로 쌌습니다

    한 갈래가 일을 하려면, 지금까지의 맥락을 다 알아야 합니다.
    무슨 작업인지, 규칙이 뭔지, 앞에서 뭘 정했는지.
    그걸 한 번 안고 가면 될 텐데, 갈래를 다섯으로 쪼개면 그 짐을 다섯 번 새로 쌉니다.
    같은 설명을 다섯 번 읽고, 같은 규칙을 다섯 번 짊어집니다.
    일은 다섯 조각인데 짐은 다섯 벌이 통째로 붙으니, 요금은 조각 수가 아니라 짐을 몇 번 쌌느냐로 매겨졌습니다.

    그러니까 제가 줄여야 했던 건 '문장'이 아니라 '몇 갈래로 나눴느냐'였습니다.
    지시문을 사포질하는 동안, 정작 돈은 그 옆에서 새고 있었던 겁니다.

    이게 비싸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.
    그날따라 일을 받아주는 쪽이 자주 버벅였는데, 갈래를 많이 펼쳐둘수록 더 잘 막혔습니다.
    예순다섯 군데를 동시에 훑던 갈래는 중간에 그대로 멈춰 서버렸습니다.
    빠르라고 펼친 게, 오히려 발이 묶였습니다.

    두 군데만 고쳤더니 일흔일곱이 따라왔습니다

    멈춘 걸 보고 방향을 틀었습니다.
    아흔 군데를 아흔 갈래로 흩뿌리는 대신, 그 자리들이 결국 어디서 같은 모양을 불러다 쓰는지를 찾았습니다.
    거의 다 두어 군데의 공통 지점을 거쳐 가고 있더군요.
    길목 두 군데를 직접 고쳤습니다.

    그 두 번으로 일흔일곱 군데가 한꺼번에 바뀌었습니다.
    아흔 중 일흔일곱이요.
    흩뿌린 예순다섯짜리 갈래가 멈춰 선 동안에, 손으로 직접 짚은 두 줄이 그걸 다 삼켜버린 셈입니다.
    옆에서 다른 작업이 같은 파일을 동시에 만지고 있었는데도, 길목 두 군데는 부딪히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.

    그제야 봐야 할 게 보였습니다.
    일을 받기 전에 물어야 하는 건 '지시문을 어떻게 줄이지'가 아니라, '이 일이 결국 몇 갈래로 흩어지지, 그 갈래들이 같은 짐을 중복으로 들지'였습니다.
    흩뿌리기 전에, 모이는 길목부터 찾는 것.
    지시문 문장은 길에 흐르는 물의 색깔이고, 진짜 수도요금은 물길을 몇 갈래로 냈느냐가 정한다는 걸, 청구서를 펼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.

    그런데 다음에 또 새더군요

    그래서 깔끔하게 끝났느냐 하면, 아니었습니다.

    길목으로 모으는 그 두 줄을 박는 과정에서, 저는 단순한 명령 한 줄을 순서를 뒤집어 쓰는 바람에 헛걸음을 했습니다.
    더 웃긴 건, 그걸 알아채고 다시 친 제가 똑같은 자리에서 한 번 더 틀렸다는 겁니다.

    며칠 뒤엔 다른 작업에서 또 샜습니다.
    이번엔 갈래들을 서로 안 겹치는 자리에 떼어놨다고 안심했는데, 그것들이 알고 보니 공통으로 건드리는 한 곳이 있었습니다.
    서로 모르고 같은 자리를 동시에 밟았죠.
    또 한 번은, 한 갈래가 결과물을 엉뚱한 데에 갖다 놨습니다.
    자기가 한참 들여다보던 자리를 기준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요.

    흩뿌리면 샌다는 걸 분명히 배웠는데도, 그 함정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돌아왔습니다.
    순서를 뒤집은 명령으로, 몰래 겹친 한 파일로, 길 잃은 결과물로.
    그래서 '흩뿌리지 말고 길목 두어 군데로 모아라'를 규칙이라고 적어두긴 했는데, 그게 법이 된 건 아닙니다.
    아직은 매번 새로 까먹는, 적어두고도 또 밟는 쪽에 가깝습니다.

    청구서는 다음 달에 또 옵니다.
    그때 제가 같은 자리를 안 밟았을지는, 솔직히 모르겠습니다.

    728x90
    반응형
Designed by Tistory.